시즌 아웃
삶이 마치 하나의 시즌제 드라마처럼 분절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시간이 흐르고 뒤늦게 되돌아보니 그때는 그런 계절이었었구나, 그 시절은 그런 모습으로 저물어 들었구나 하고 뒤늦게 깨닫곤 했었지만, 이제는 살아가는 일에 경험치가 쌓여 어느 샌가부터 담담히 각 계절의 끝이 다가옴을 알고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 간 몇 개의 계절을 보내주었을까.
생각해 보면 각 삶의 뭉텅이들은 한 구석도 닮은 데가 없었다. 여느 때에는 그저 집-학교-집-학교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을 보내면서도 지루한 줄 몰랐었고, 여느 때에는 전국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주말을 채워나가면서도 삶의 슴슴함을 토로하곤 했었다. 계절이 지나자, 마치 내 몸의 일부처럼 가까웠던 그이와 서로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리곤 말았는데, 이제사 되짚어보니 출연료 협상에 실패한 시퀄 드라마와 똑 닮은 모습이라 우스우면서도 구슬프다. 협상에 실패해 함께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으니.
시즌이 끝나고 나면, 아무런 연유 없이 두고두고 기억되는 장면들이 생겨나곤 했다. 군인 시절, 여느 날 수송 버스 안 라디오에서 몽롱히 흐르던 김윤아의 봄날을 간다를 아직 기억한다. 특별히 그 순간을 기억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지만,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찰나의 순간만큼은 내게 마치 하나의 사진처럼 또렷이 남아있다. 이따금 당연히 기억해야 할 무언가를 잊어 난처해할 때도 있었는데, 그런 사소한 순간을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겨두는 걸 보면 사람의 기억이란 건 참 제멋대로다.
아쉽게도 또 하나의 계절이 끝을 향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번 계절의 끝은 그 징후가 너무나 명확하다. 친구들은 하나둘 가정을 꾸렸고, 누나가 독립한 집 안의 공기는 예상보다 더 적막하다. 때마침 기회가 닿아 홀로 오랜 시간 해외에 나가게 되었고, 퇴로를 차단하듯 속해있던 부서도 없어져 돌아갈 자리가 사라졌다. 이 정도면 이때쯤 시즌을 마쳐야 한다는 작가의 개입이 도를 넘는 수준이니, 그저 그 사실을 받아들이며 끝나가는 이 계절을 덤덤히 정리해 볼 뿐이다.
이 계절은 내게 어떤 장면을 남겼을까.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때로는 늘어난 나이를 외면하며 철없이 행동하기도 했고, 때로는 나답지 않은 선택을 해 혼란을 겪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그 혼란스러움만큼 뜨겁게 누군가를 사랑했고, 그 철 없음만큼 다양한 세상을 만났으니,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계절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삶이 그치지 않는 한, 또 새로운 시즌이 시작될 터이니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겠지. 솔직히 말해 기대보다는 걱정이 더 많은 다음 시즌이지만 그래도 우걱우걱 한 걸음씩 미지의 계절로 발을 내디뎌 보려 한다. 다음 계절은 뜨거운 햇빛 내리비치는 여름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