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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tersuweet

우연히 뻔하게도

무기력을 느낀다. 때로는 삶의 중차대한 사건들이 너무나도 사소한 우연들을 통해 좌우된다는 것을 느낀다. 오래전 술을 진탕 마신 후 새벽 일찍 일어나 잡아탄 열차에서 그녀를 만났다. 만일 딱 한 잔을 더 마셨다면, 그래서 다음 날 새벽 그 열차를 잡아탈 수 없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를 만나 함께 수년을 보냈을까. 만일 몇 년 전 수요일 퇴근 후 책 모임을 신청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요리조리 에세이 모임에 찾아들어 와 이 글을 휘갈기게 되었을까.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이다. 내 삶을 통째로 좌우한 그 사건들은 큰 의미 없이 그저 우연히 펼쳐졌고, 나는 그 찰나의 파도에 맞춰 이리저리 팔을 흔들며 어영부영 여기까지 나아오고 말았다.

무기력을 느낀다. 한낱 인간으로서 모든 것이 정해진 양 정해진 길로 하루하루 나아가게 되는 것을 느낀다. 어느덧 나이가 차 각자에게 더 소중한 것들이 생기고, 그와 반대로 덜 소중한 것들에 대한 중력이 옅어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자연스레 일상적인 연락을 주고받던 관계들이 소원해지고, 생일에 받던 메시지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듦을 느낀다. 누군가 21세와 41세의 하루 평균 카톡 메시지 수를 집계해 주면 좋으련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당연히 벌어진 일이라는 걸 체감하면 허한 마음이 조금 덜 해질까. 복사 붙여 넣기 하듯 똑같은 삶의 곡선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그것만은 아니다. 수십 년 전 일본의 모습처럼, 봄여름가을겨울이 돌고 돌듯, 한국은 차분히 개화해 정점을 맞이하고 있다. 내 어릴 적 일본처럼 여러 나라에서 한국 드라마와 음악을 선망하는 모습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한국의 회사들은 언제까지 지금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내 열심과 상관없이 이 사회는 한동안 열심히 발화하다가 동력을 잃고 죽지도 피지도 못한 채 그저 그런 채로 남은 생을 살아가게 되겠지. 나도 일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수도권 어딘가의 낡은 아파트에서 차분히 죽음을 기다리는 노년이 될까.

망망대해 위 초라한 뗏목에 몸을 의탁한 채 자그마한 노를 젓는 게 인생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쪽이든 나아가 보려 애써 노를 젓지만 결국 밀려오는 파도에 밀려 노의 방향과는 상관없이 여기저기 밀려가고, 내가 저었던 노의 힘은 그저 여기저기 휘청이는 갈지자 움직임을 만드는 정도에 그친다. 그저 다행인 것은 초라한 이 뗏목 위에서도 운이 좋게 풍랑을 피해 뒤집히지 않고 대견히 살아있다는 사실 정도이다. 삶은 상상 이상으로 연약하기에 자그마한 파도 하나에도 뗏목은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걸. 한편으로는 동으로도 남으로도 가지 못할 거라면, 그저 뗏목이 뒤집혀버리는 것도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닌 듯싶다.

내 삶이 내게는 너무나도 소중한데, 이 소중한 삶은 그저 우연과 필연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의도치 않은 사소한 우연들이 모이고 모여 무언가, 누군가를 결정해 내 평생을 채워나가게 된다. 반대로 가끔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미리 정해진 대로 뻔하디뻔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우연의 불안이 지금 내 날갯짓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에 기인한다면, 필연의 불안은 지금 내가 어떤 날갯짓을 하더라도 아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기인한다. 결국 본질적으로 내 삶을 내가 결정하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인데, 원래 인간은 그저 그 정도의 존재인 걸까.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저 파도에 휩쓸릴 줄 알면서도 나는 멀리 안온한 해변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노를 저을뿐이고, 파도는 내게 다가와 이리로든 저리로든 나를 끌고 가겠지. 스텝이 엉켜야 비로소 탱고가 시작된다는데, 나도 뭐 비스무리하게 노와 파도가 섞였으니 이제사 인생이 시작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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