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잊지 못할 찰나를 맞닥뜨렸음을 직감할 때가 있다. 삶은 꽤 영화와 닮아 행복과 불행 둘 중 무엇이든 구분치 않고 마구 일어나기 마련인데, 가끔은 그 모양새가 너무나 또렷해 그 찰나를 지나면서도 아 이건 행복이구나, 아 이건 불행이구나, 하고 즉시 알아채 버리곤 마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해 생애 처음으로 대서양을 목도한 순간이 있었고, 반대로는 오랜 연인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달은 순간 내 눈앞에 쪼그려 앉은 그녀를 바라보던 순간이 있었다. 2018년의 여느 하루도 얄궂게 내게 그런 찰나가 되었다.
나는 삼남매의 막내로 살아왔다. 서울 변방의 변변치 않은 동네였지만 큰 누나는 여러모로 동네에서 회자되는 인물이었다. 아빠를 닮은 또렷한 이목구비 덕에 남자아이들의 관심을 끌어 초등학교 시절 고학년 형들이 괜스레 내게 시답잖은 시비를 걸게 만들었고, 공부도 곧잘 해 중학교 시절에는 몇 번이고 전교 1등을 차지하곤 했다. 강남 8학군과 맞닿아 있는 동네의 특성상 중학교 때 공부 꽤 했던 친구들은 자연스레 주소를 옮겨 8학군의 명문 고등학교로 진학하곤 했는데, 없는 살림이었지만 전교 1등씩이나 하는 큰 딸을 그대로 두기엔 아쉬웠던 엄마는 주소를 옮겨 누나를 8학군 고등학교에 안착시켰다. 누나의 명문고등학교 생활은 생각만큼 순탄치 않았다. 동네 친구들을 떠나 홀로 먼 고등학교로 통학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테고, 별거 아닐 수도 있는 관악구와 동작구의 생활 수준 격차 또한 누나에겐 벽으로 다가왔을 듯했다. 여느 날엔 내게 뜬금 없이 태평 데파트가 어딘지 아냐고 물어왔는데, 아무래도 반 친구들 간의 대화에서 나온 장소를 추측하는 듯했다.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친구들에게 그 장소를 쉽사리 물어보지 못할 만큼 누나가 위축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3년은 누나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 누나는 졸업 후 서울의 여느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했지만,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1학년을 채 마치지 않고 학교를 자퇴했고, 그 후 몇 년간은 아르바이트와 칩거를 번갈아 가며 지지부진한 시간을 보냈다. 두어 번은 다시 수능을 봐 대학에 가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고, 종종 병원에 가 상담을 받는 게 누나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부끄럽게도 막 이십 대를 맞이한 내게 누나는 시야 밖 존재였고, 나는 점점 심각해지는 누나의 상황을 모른 채 타인을 돕는다며 1년간 해외로 떠나기도 하며 누나와 나의 이십 대를 흘려보냈다.
30대에 들어서며 많은 것들이 나아지는 듯 보였다. 목사님이신 고모의 도움으로 누나는 사회복지사라는 목표를 가지고 늦게나마 다시 대학에 진학했고, 늦깎이 대학생들이 흔히들 그렇듯 높은 학점을 받으며 무사히 졸업에 성공했다. 현실적으로 사기업 취업에는 늦어버린 나이였지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에는 그리 나쁘지 않은 시기였다. 때마침 작은 누나도 나도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기에 집안 사정도 눈에 띄게 나아졌고, 다소 굼뜨긴 했지만 매일 착실히 독서실에 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큰 누나의 모습을 보며 엄마, 아빠, 그리고 우리 삼남매의 삶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다. 큰 누나와 나는 그저 퉁명스러운 대화만 한 주에 두어 번 주고받는 사이었지만, 그것 또한 여느 남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2018년 10월의 여느 날 출근길도 전화 한 통을 받기 전까지는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오지 않을 시간대에 엄마에게 온 전화였기에 전화가 울리는 동시에 불길한 느낌이 들었고, 난생처음으로 엄마의 흐느낌을 들으며 불길함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한 시간 전, 내가 집을 나설 때까지 멀쩡했던 누나가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 사당역 버스전용차선을 넘어 차 머리를 돌리며 오만 감정이 교차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집으로 향하던 내 차의 행선지는 이름 모를 부천의 병원으로 바뀌었다. 우습게도 누나보다 먼저 병원에 도착한 나는 응급실과 영안실 모두를 살펴야 했다. 살아있다면 응급실로, 그게 아니라면 영안실로 오게 되는 생사의 기로 위에 나는 그저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였다. 그 병원 입구에서 아직 오지 않은 구급차를 기다리며, 나는 그 찰나가 내 생에 영원히 남을 겨울임을 직감했다.
구급차는 영안실로 도착했다. 장례를 준비하는 잔인한 과정을 부모님께 맡길 수는 없었기에 난생처음으로 집안의 가장 역할을 맡았다. 생각보다 더 챙겨야 할 일이 많았다. 망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이송 비용을 지불한 뒤, 이모의 조언에 따라 사람들이 오기 편한 서울로 장례식장을 옮겼다. 급히 챙겨야 할 일들을 마무리하고 나니,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경찰 조사를 받으며 누나의 마지막 모습을 진술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눈물이 쏟아졌다. 장례 기간 내내 사람들 앞에서는, 특히 부모님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으려 노력했다. 가족 중 적어도 한 명은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장지를 정하고,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 속에 무사히 3일간의 장례를 마무리했다.
장례를 마친 다음 날, 가족 네 사람은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다소 차분해진 분위기 속에서 큰 누나를 떠올리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 순간 우리 네 사람에게는 그 무엇보다 서로를 지켜내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에게 닥쳐온 이 불행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지나치게 자책하지 않으며, 더 이상의 불행을 만들어내지 않는 게 중요했다. 서로를 지키기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하고 이성적이어야 했다. 큰 누나의 이름이 나오는 걸 굳이 피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마음의 병 또한 하나의 질환임을, 마치 암처럼 우리의 힘으로 막아낼 수 없었던 것임을 기억하려 애썼다. 동시에 누나가 떠난 흔적을 차분히 하나둘 정리해 나갔다. 누나가 다니던 독서실을 찾아 남겨진 짐을 정리했고, 누나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있던 부천을 떠나 외가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성남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 작은 누나와 엄마는 유가족 자조 모임에 나가 이 슬픔이 우리 가족만의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되며 마음의 무게를 덜었고, 나는 큰 누나의 평소 바람대로 일 년간 술을 끊었다.
그 일은 참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다. 친척분들은 더 이상 엄마를 '혜영이 엄마'로 부르지 않았고, 나도 어느샌가 '작은 누나'를 그저 '누나'로 부르기 시작했다. 일년 정도는 누군가가 무심코 형제관계를 물어올때면 괜시리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저 누나 하나 있어요 하고 무던히 대답하게 되었다. 기일과 생일, 일년에 서너번 누나의 납골당을 찾는 게 우리 가족의 새로운 명절이 되었다. 서로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함을 알게 되었기에 가족끼리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하려 노력했다. 이따금 희귀한 행복의 순간들을 맞이할 때마다, 이 곳에 누나가 함께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하지만, 언제나 아쉬움은 늦기 마련이다.
나이 먹기를 포기한 누나보다 나이가 많아진 나는 시답잖은 세상사에 관심이 많았던 누나에게 그간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상상을 한다. 누나가 좋아하던 악동뮤지션은 아직도 잘 활동하고 있고, 2020년에는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전세계를 휩쓸어 몇년간 모든 사람들이 집에 틀어박혀 있었노라고, 아쉽게도 누나의 두 동생은 아직 시집장가는 가지못했고, 그래도 하루하루 씩씩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고. 언젠가 다시 한번 누나를 만날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그때는 아무말 없이 누나를 꼬옥 한번 안아주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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