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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 Book

비릿한 과거와 조우할 때 (우리가 고아였을 때 - 가즈오 이시구로)

과거는 어찌보면 각자의 뇌 속에 남아있는 작은 파편정도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기도하고, 추억을 나누기도 하면서 그 의미를 배가시켜보려하지만, 결국 과거는 순간순간 파편화되어 흐릿하게 머릿속에 남는다. 어쩐지 글이 잘 읽혀지지 않더라니, 이 글은 노년의 크리스토퍼가 그렇게 파편화된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자신과 가족의 삶을 회고해보는 일종의 회고록이었다.

 

의기 넘치는 어머니와 그녀를 진정으로 위하는 아버지까지 크리스토퍼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가족의 모습은 기구할 지언정 멋졌다. 덕분에 글을 읽는 나도 그 뒤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의 부모님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던 걸까 하는 기대를 가지며 후반부로 달려갔다. 그런데 아름답게만 그려졌던 과거의 기억들은 하나하나 부서지고 만다. 야심이 가득해보였던 세라 헤밍스는 도박쟁이가 된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고, 크리스토퍼의 유일한 옛 친구 아키라는 전쟁통에 같은 편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로 전락해버린다. 거대한 음모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숭고하게 희생된 줄 알았던 부모님의 행방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알았을 때는, 특히 글 내내 담담한 표현들이 오가던 중 갑자기 등장한 삼촌이라는 작자의 적나라한 표현들은 더이상 어떠한 희망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고아로만 자란 줄 알았던 크리스토퍼가 사실은 어머니의 말도 안되는 희생 아래 성장해왔다는 걸 알게 됐을땐 이유 모를 죄책감까지 들었다.

 

"공동조계"라는 물리적 공간처럼 우리는 추억 혹은 고향을 하나 만들어 가슴에 묻어두고 산다. 모든게 아름다웠고 순수하기만 했던 순간으로 기억하며 산다. 하지만 삶은 완전하지 않고, 추억으로 기억하는 그 순간조차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아니 혹은 크리스토퍼의 경우 처럼 잔혹하기까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비릿한 순간들이 군데군데 숨겨져있는게 우리 삶인걸. 그래도 한가지 다행인것은 드디어 런던을 고향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크리스토퍼의 모습이나, 그날 그순간 나타나지 않았던 크리스토퍼를 원망하지 않는 세라 헤밍스의 모습처럼, 그리고 어마어마한 비극을 견뎌낸 어머니의 모습처럼 시간은 참 많은 것을 무뎌지게하고 해어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