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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 Book

붙잡을 수 없는 것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빈부를 막론하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만 한다. 그게 뭐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서른을 넘기며 하루하루 푸석해지는 피부를 바라보는 나에게는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 그리고 젊음이 멀어진다는 것은 막연한 두려움이기만하다.

 

도리언 그레이에게도, 마리아에게도 젊음은 영원토록 붙잡고만 싶었던 하나의 자아와도 같았다. 도리언 그레이에게는 누구에게나 칭송 받을 만한 순수함을 내포하고 있는 외모가 자신의 자아였고, 마리아에게는 어린 나이에 평면적인 연기를 보이는 선배연기자와 대조되는 입체적 연기를 펼치는 극중 시그리드가 본인의 자아였다. 하지만 실스마리아에 흐르는 구름처럼, 자아는 그리고 젊음은 붙잡을 수도 붙잡아서도 안되는 무언가였다. 도리언 그레이는 본인의 순수성에 집착하기 시작하며 점점 주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기 시작했고, 결국 자기자신까지 파멸의 길로 빠지고 말았다. 마리아는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신예 배우인 조앤에게 한편으로는 매력을, 한편으로는 상대적 상실감을 느끼며, 과거처럼 자유롭지도 순수하지도 않은 '클래식'한 본인의 현재에 막연한 거부반응 보이고, 결국 소중했던 발렌틴을 보내고 만다.

 

도리언 그레이는 파국을 맞았지만, 다행히 마리아는 결국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를 어느 순간 깨달은 듯하다. 실스마리아의 구름처럼 붙잡을 수 없다면 그 흘러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깨닫음 이후에 발렌틴이 사라지는 건 결국, 발렌틴은 사실 아직 놓지 못했던 본인의 자아라는 은유 아닐까, 사실 다중인격이 아닐까 의심도 했다.) 발렌틴이 떠난 이후 조금씩 헬레나로써의 정체성을 찾아가던 마리아는 조앤 연기에 관한 사소한 다툼을 통해 극 중 배경처럼 흐려져야하는 본인의 역할을 받아들인다. 그리곤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으로 작품을 선택하며, 시간을 초월한 무언가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임종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사는 노년들을 바라볼 때, 젊음을 잃은 우리가 과연 그럴듯한 역할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언 그레이처럼 찢어지기보다는 헬레나처럼 흐려지는 삶이 조금 더 나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오늘밤 자고 잃어나면 나는 하루만큼 더 헬레나에게로 다가갈 것이다.